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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정의 마임노트
98' 한국마임을 보고



이번 평은 조금 지난평이다.
하지만 마임평이 거의 없는 실정이고 또 박윤정님의 냉철한 시각이 작가들의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 박 윤정의 마임노트 .............「'98 한국마임」을 보고



불안한 서른,냉철한 자기반성과 준비가 절실하다.
먼저, 변명 몇 가지 평소, 아무개의 '~ 스케치'니 '~일기'니 하는 투의 제목을 보면 읽기도 전에 먼저 짜증부터 나곤 했었다. 그런

류의 글들은 일면 자유롭고 솔직하게 쓰여졌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대개는 비전문가가 그야말로 비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나른하게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만을 풀어 헤쳐 놓은 것이기 십상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마임일기'라는 제목을 단 이유는, 이 글이 공연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실제비평을 위한 학습과

훈련을 바탕으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분명히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글은, 마임예술가들 자신의 예술적 성숙도 때문이든 전반적인 주변 여건 때문이든,아직은 소수의 예술로 밖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마임예술을 아끼는 한 관객의 애정 어린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인상비평 수준의 글을 그것도 숱하게 널린 본격 비평가들도 외면하는 마임에 대해서 굳이 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일까?
먼저, 기성 비평가들의 비평문들을 보면서 의외로 비평의 기능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평도 곧 평론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이므로 순수하게 문학적인 읽는 재미를 주어야 한다는

비평문의 성격적인 면을 놓고 볼 때, 불필요하게 얽히고 설킨 비문이나 현학적인 전문용어들의 남발, 실제 공연이 아닌 이론을 위한

비평이론들의 과시적 이용등으로 인해 글을 읽는 재미는 고사하고 문장의 정확한 뜻을 해석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관객과 예술가 사이의 대화 속에 생길 수밖에 없는 공백을 관객들 스스로 메우면서 공연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비평의 주요 기능이라고 볼 때, 신문의 보도 기사처럼 사실의 나열에만 머물거나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급급한 경우도 많다.

당돌하지만,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다른 형식의 비평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여타의 공연예술 중에서도 특히 마임 예술에 대한 기록 작업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임예술의 비대중성과 마임예술가들의 수적 열세, 적은 공연횟수,예술적 완성도의 문제등으로 인해 마임공연평을 실어 줄 지면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황 때문인지, 기성 비평가들 중에서 꾸준한 관심을 갖고 마임공연을 보러 오는 비평가들이 너무도 적은 것 같다.


한국 마임의 경우 이제 한창 그 역사를 만들어 가는 시기에 놓여 있으며 어느 면에 선 모든 공연예술의 훌륭한 자양분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마임이란 점을 감안할 때, 마임예술에 대한 평론가들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조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체계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그렇다고 예리하지도 못한 감상문 수준의 글이지만 위의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이 글을 시작한다.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할 서른의 의미 한국 마임이 어느 새 삼십대의 나이로 접어 들었다. 모든 변화속도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굳이 삼십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키는 것이 어쩌면 낭만적인 발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일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정 예술 장르의 역사에서 30년이란 시간이 갖는 의미는 변함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성격과 형태의 변화 사이클이 끊임없는 발전적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 역사라고 할 때, 진정한 변화 발전을 위한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시기가 바로 삼십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른은 무질서하고 주관적이며 혼돈 투성이었던 그 동안의 모색과 방황의 흔적들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선별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때이다.

자신의 뜻을 널리 세상과 공유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다시 세워야 하는 시기가 바로 삼십이란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른을 맞은 한국마임은 과연 서른의 나이에 걸맞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98 한국마임」공연을 놓고 볼 때, 아직도 20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임 예술가들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객은 무죄이며 무대는 냉정한 곳이라는 가장 중요한 진실을 망각하고 있는 듯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마임예술에 꾸준히 몸담고 있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벌써 11년째를 앞두고 있는 춘천국제마임축제와 체계적인 전문교육을 받은 마임예술가들의 증가, 느릿느릿 그러나 차분하게 형성되고 있는 전문기획팀 등으로 인해 마임 관객층의 소양과 저변은 몰라보게 확장되고 있다.

어차피 범대중적인 예술 장르로 군림하지는 못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 마임임을 감안할 때, 마임예술에 필요한 정도의 관객층은 이미 확보되었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관객 의식의 다양화와 변덕스런 자유로움, 예술 향유의 기회 증가, 예술활동의 다양한 접목등으로 인해, 앞으로의 시대는

어떤 예술 장르든 모든 대중을 포용할 생각을 품는다는 것이 그야말로 어리석은 욕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동안 힘들게 확보해 놓은 마임관객층을 보다 높은 수준의 마임매니아층으로 키워나가면서 관객과 예술가가 함께 즐기며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은 마임예술가 자신의 보다 치열한 예술의식 확립과 활발한 공연활동의 증가이다.

마임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빈약한 마임관객층, 적은 수의 마임예술가와 열악한 주변 환경 등, 그 동안 한국마임에 관한 논의에서

단골메뉴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변명의 말들은 이제 과감히 버려야 할 때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런 여러 문제점들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의 준비가 공연을 하는 배우들의

자세를 앞지르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 역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의적으로 침묵을 선택한 마임배우에게 있어 관객과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배우의 몸짓밖에

없다. 고통을 하소연하든 변명을 하든, 우리의 전반적인 예술 여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도움을 청하든 그 무엇을 하든, 이젠 무대 위에서의 몸짓을 통해 해야할 때이다.

성실하고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지 못하는 배우는 그가 갖고 있는 변명의 말들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침묵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배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다.

모든 그럴듯한 자기합리화의 말들은 버리고 좀더 냉정하게 내관 해야 할 때이다.

그럴 때라야만 불필요한 군더더기나 겉치장 없이 표현하고 싶은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보다 자신있게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한 명의 배우로서 가져야 할 철저한 프로의식도 그런 노력 속에서 자연스레 싹트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마흔을 맞는 쉰을 맞는

한국 마임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갖게 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기대되지만 아쉬웠던 다양성 한국마임의 내일을 낙관적으로 관망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짧은 역사와 적은 수의 배우 층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마임의 세계가 지극히 다양하고 자유롭다는 점이다.

동양적인 사상과 소재들을 바탕으로 이제 막 진정한 작가의 반열에 들기 위한 또 다른 관문을 통과해 나가고 있는 유진규의 주관적

체계를 담은 독자적인 마임세계와 우리 고유의 소리와 의상, 정서 등을 바탕으로 관객과의 편안한 어우러짐의 장을 꿈꾸는 조성진의 오픈된 마임,모던 마임의 협소한 틀을 뛰어넘어 연극과 무용, 오브제, 소리 등을 이용해 포스트모던 마임의 다양한 모습들을 실험적이고도 재미있게 선사하고 있는 사다리 임도완 유홍영의 마임, 활발한 활동과 유진우, 잘 다듬어진 몸과 훈련된 몸짓으로 정통적인 모던마임의 세계를 깔끔하게 선보이고 있는 남긍호와 박미선, 이태건,구체적인 스토리 전개와 재미있는 구성으로 발랄하면서도

메세지를 담은 판토마임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고재경,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영상이나 무용 같은 다른 표현 매체의 수용을

통해 이미지 위주의 또 다른 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강정균,어떤 틀에 구속됨이 없이 오브제를 이용한 마임과 퍼포먼스적인 몸짓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강지수, 성실하게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이원범 등이 그들이다.

 

이번「'98 한국마임」에서도 그런 다양성과 새롭고 자유로운 실험적 노력들을 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다양한 노력들의 결과를 놓고 볼 때는 그리 만족스런 공연이었다고 할 수 없다.

불완전한 미완의 시도와 아직은 자기 것으로 소화되지 못한 선구적인 표현 방법들의 다소 불성실한 실험, 이미 선보였던 작품들의

구태의연한 반복 등은 있었으되, 새롭거나 실험적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성실한 공연들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

다.

 

먼저「빈 손」공연을 통해 가장 큰 기대감과 호기심을 자아냈던 유진규의 공연을 살펴보자.「빈손」공연을 보면서 ' 훗날 누군가

유진규의 마임세계를 정리한다면 이 작품이 커다란 전환점 역할을 하는, 새로운 작품세계의 초입을 장식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기록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만큼「빈 손」공연 속에는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강렬한 압축미와 간결성, 자기학대

에 가까운 섬뜩할 정도의 고뇌와 담담한 듯 절규섞인 자기응시를 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유진규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그래서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몸을 빌어서 밖에 보여줄 수 없었던 유진규 자신의 살풀이 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유진규 내면의 본질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간 공연이었기 때문에, 다소 난해한 내용과 갑작스런 변화가 주는 당황스러움에도 불구

하고 관객들의 내면에 무리 없이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이다. ' 저렇게 처절하게 비워낸 다음에는 과연 어떤 것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이번「98 한국마임」공연에서 유진규가 그 비워낸 자리에 다시 담아내 보여준 것은 희망적이지만 다소 아쉬운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한지라는 우리 고유의 소재가 갖고 있는 질감과 색감, 성질을 이용해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던 듯 사라져 버리는 모든 존재들의 무상함과 실제적인 것 같은 현세의 모습들이 결국 허상에 불과한 다양한 이미지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은 일관되면서도 아주 흥미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한지와 몸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다 짜임새 있게 구성해서 이미지만이 아닌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통해 그 주제를 전달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작품의 구조가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이미지의 반복적 전달은 그 이미지가 아무리 참신하고 분명한 것일지라도 지루함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유진규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비워낸 상처에 연연해하지 말고 완성된 작품들로 차분하게 그 자리를 메워 나가는 것임을,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하고도 체계적인 마임세계를 가꿔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의 독자적이고도 주관적인 내면 세계를 담아낼 보다 객관적이고도 체계적인 그릇을 구워나가는 것이 가장 필요할

것 같다. 즉, 그만의 단단한 주관적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는 의미이다.

한국적 마임이란 수식어도 그런 연후에야 보다 정확하고 진지하게 정의 내려야 할 문제가 아닐까?

 

지금의 한국마임에서 사다리만큼 유쾌하고 활력 넘치는 극단도 없는 것 같다.
그만큼 앞으로의 그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번 공연에서 사다리는 가장 활발한 실험과 모색의 결과물들을 선보였다

< 병플룻 연주>의 경우, 공연 프로그램을 위해 집어 넣은것 같다는 생각이들긴 했지만 그런 대로 재미 있었다.

< 꿈에>는 인형의 몸짓을 이용 한 한 편의 귀엽고 아름다운 작은 동화 같은 소품이었다.

실제 배우의 몸짓보다도 인형의 몸짓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역시 새로웠다.

개구리 왕자 이야기를 패러디 한 <구리 왕자>는 무용적인 움직임과 소리, 마임적 몸짓이 결합된 작품이었다.

불필요하게 코믹한 효과를 연출 하지 않고 배우들의 움직임에 좀 더 무게가 있었다면 더욱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다.

이 외에 현대무용적인 움직임과 분위기를 잘 살린 <럭비>, 배우들이 조종하는 넓은 하얀 색 고무줄의 형태변화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 간 <선>, 만화적인 표정 그림과 경쾌한 음악, 배우들의 익살스런 움직임을 통해 사진사와 한 여자 손님의 코믹한 이야기를

표현해 낸 <사진>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소리의 화음과 움직임, 대사를 두루 이용해 영화 터미네이터 Ⅱ를 마임으로 재구성한 <밴드마임(터미네이터 Ⅱ>의 경우,

밴드마임의 개념에 대한 낯설음과 움직임의 무게와 존재감이 떨어지는 배우들의 몸짓, 생략과 압축을 통한 나름의 해석이 아닌 충실한 마임적 재현에 그 친 구성으로 인해 의도와는 달리 충분한 효과를 살려내지 못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사다리의 공연은 그나마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완벽도야 어찌되었든 활발한 모색과 노력의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 공연장을 나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머리 속에서 그 영상을 지울 수 없던 작품이 과연 얼마나 되었는가?' 하고 자문해 보면,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공연을 보면서 그처럼 신나게 깔깔대었는데, 왜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이 드문걸까?


새로운 형식은 있되, 그 새로운 형식에 걸 맞는 메시지의 함축이 부족하고 작품의 호흡이 전체적으로 너무 짧았던 것이 이유가 아닐

까? 또한 좀더 경험있고 훈련된 배우들이었다면 보다 감칠맛 나는 깊이를 느끼게 해주었을 법한 작품도 무언가 싱겁고 밍밍한 배우들의 몸짓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말해 아주 성실한 학생들의 즐거운 학예 발표회를 본 듯한 느낌을 준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사다리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극단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선생과 활기에 찬 배우들, 자유로운 극단 분위기가 그 믿음을 뒷받

침해 준다.

덧붙여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아직 훈련중인 배우들의 실험 공연뿐만 아니라 임도완과 유홍영 두 배우의 개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도 하루 빨리 다시 갖게 되었으면 한다.


남긍호와 박미선 역시 한국마임에선 아주 중요한 존재들이다. 허동성의 말처럼 ' 표현을 위한 아름다운 흉터 ' 를 남긍호 만큼 완벽

하게 몸에 새겨놓고 있는 배우가 드물고, 또 박미선은 현재 한국에선 유일한 여성마임이스트인데다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오랜

동안의 훈련을 통해 활발한 창작활동을 위한 무기들을 많이 비축해 놓고 있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둘의 이번 공연 역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박미선의 작품 <홀로서기> 의 경우, 스토리도 그렇다고 이미지도 팽팽하게

긴장 어린 몸짓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혼자 끄적끄적 거려 놓은 재미없는 낙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용인지 마임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 모를 몸짓을 통해 자기만의 좁은 주관적 틀 안에서 울림없는 외침들을 힙 없이 내뱉고

있는 듯한 느낌. 이전의 박상숙 공연과 같은 모습을 답습하게 되지 않길 바라며, 당당하고 책임감 있게 시야를 밖으로 돌려서 새로운 훌륭한 작품들을 보다 활발하게 선보여 주었으면 한다.


남긍호의 <키스>는 연극 <키스>를 통해 이미 선보였던 작품이었다.

남긍호의 공연은 다른 공연들과 비교해 볼 때, 썩 훌륭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남긍호 개인의 발전적 변화라는 기준을 놓고 볼 때는 무언가 둔탁하게 얽히고 응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미묘한 그래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변화이지만 관객들은 공연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느낄 수

있는 무서운 촉수를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운 근육 속에 녹아들어 있던 표현에의 욕구와 긴장들이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시원스레 풀려 나가면서 팽팽한 그러나 아릿한 시적 선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몸의 근육은 움직이되 그 근육속의 정신은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불편하게 엉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그 짜릿해야 할 긴장된 움직임이 어딘지 모르게 둔탁하게 삐걱대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필자의 근거 없는 억측일까?
그 곪아있는 부분을 도려 내고 치유할 메스가 필자에게는 없다. 그저 그 작지만 선명한 느낌이 기우였음이길 바랄 뿐이다.

 

조성진과 강지수의 합동 공연은 재미있는 시도였다. 함께 공연해 본 적도 없고 세대도 그간의 활동 방향도 다른 것 같은 두 배우의

의기투합은 충분히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의기투합은 명백한 불발로 끝나고 만 느낌이다. 둘이 함께 공연한 <배회하는 넋, 떠도는 너>는 일단 그 주제의 선택과 소재면에선 훌륭했다.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지금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 모두의 보편적 문제들을 보여주는 공연들이 너무도 부족한 우리의 마임계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숙자 문제를 마임의 소재로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러나 강지수가 표현한 노숙자의 얼굴과 몸짓에는 전혀 노숙자의 아픈 사연이 배어있지 못했다.

게다가 왜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없이 무턱대고 떠돌기만 하는 노숙자의 모습은 전혀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다.

또한 공연 시작 부분에서 그들의 배회하는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굿의 형식을 빌린다는 설명과 함께 관객들을 무대 위에서 빙 둘러

앉게 만들었는데, 그 공연 어디에서도 명확한 굿의 형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대 위에 둘러앉은 관객들이 함께 극 속에 참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힘이 달리는 배우들을 위해 들러리를 서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체불명의 그림을 걸어놓고 향을 피우며 절을 하는 것이 굿을 형식을 빌린 것인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인물 설정과 일상의 몸짓을 그대로 무대 위에서 모방하는 듯한 배우의 비연극적인 몸짓, 노숙자들의 내면 풍경

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그들의 넋을 위로해 주겠다는 오만한 발상등으로 인해, 오히려 진짜 노숙자들이 이 공연을 보았다면 콧방귀를 뀌고 돌아섰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조성진이 맡은 중개자의 역할, 무당 같기도 하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나 광대의 역할까지 두루 포함할 수 있는 그 역할과 강지수

가 맡은 역할을 몸짓을 통해 좀 더 분명하게 대비시켜 보여 주고 탄탄한 스토리와 설득력 있는 굿의 요소들을 도입한다면,

슬픈 이야기지만 시원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공연이 될 것 같다.

덧붙여, 무대가 배우와 관객의 교감의 장소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배우 혼자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허용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일단 무대에 선 배우는 관객들을 그 안으로 끌어 들여 함께 얘기를 나누고 에너지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생각을 무대적인 언어로 철저하게 계산해서 전달하려는 구체적인 노력 없이,

내 생각은 이런데 왜 함께 즐기지 못하느냐고 관객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마추어적인 의식과 자세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거리 공연의 경우, 그런 면에서 상황이 약간 다르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강지수의 작품 <어머니>의 경우, 그 자체로는 많은 아쉬움을 안고 있다.

그러나 강지수 개인의 행보를 놓고 볼 때는 많은 발전의 징후들을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자신도 충분하게 소화해낼 수 없는 관념적이고 무거운 주제들에 매달려 어설픈 실험이나 불필요한 장식을 통해 그 내용을 포장해 보여주려던 모습을 탈피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강지수 개인이 생각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표현하는 그의 몸짓도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일상의 움직임을 가감 없이 그대로 묘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사진을 찍는 것 같은 정지동작을 통해 점점 잦아들고 약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단계별로 표현하려 한 구성은 좋았으나, 각

장면 전후의 변화 흐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는 몸짓이든 장식이든 대사든 다 그 나름의 분명한 존재 이유를 갖고 있어야 하는 데, 강지수의 경우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였으며 무대 위에서의 몸짓과 공간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버려 두지 말고 그 뼈대를 잘 다듬어서 마르소의 <인생>처럼 녹지근하게 젖어드는 작품으로 완성시켜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포스트모던 마임의 중요한 산실 중의 하나인 자크 르콕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유진우의 무대는 다채롭고 일면 신선하며 풍성한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 풍성하게 차려진 밥상 위에 무언가 설익고 양념이 덜 되 있으며 잘 버무려지지 못한 요리들이 올라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어둠의 판타스틱-미스테리>는 빛과 어둠, 죽음의 힘들을 시각화시켜, 어둠이 죽음이 빛을 가리고 삼켜

버리게 된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음울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화려한 의상과 분장, 서사적이고 예언적인 내용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우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스케일이 큰 작품이었다.

그러나 역시 배우들의 미숙한 몸짓과 그로 인해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야기구조, 그 자체론 신선하지만 배우의 몸짓을 압도해버리는 의상 등으로 인해 의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다른 공연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색감과 독특한 디자인의 의상들이 눈을 끌었으나, 그 의상을 지배할만한 배우들의 역량이 부족해 마치 극적 줄거리가 약간 가미된 무대의상 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장면들도 있었다.

반가면을 이용한 코미디 델라르테 형식의 2장 작품들은 1장과 3장의 작품에 비해 짧지만 분명하게 와 닿는 내용과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인간적 코미디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전체적으로 코믹 효과를 밑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가벼운 슬픔과 우울, 따스함, 맹목적인 광기(약간 비약적인 해석이지만 <수술실에서>의 경우)의 정서와 세태 풍자적이면서 우리의 내면을 부담 없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내용들을 잘 담아냈다.

특히 <심심해 죽겠네>의 경우, 최첨단 현대문명의 이기 덕택에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

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점점 더 황폐화시키고 삶의 속도만을 불필요하게 가속화시키고 있는 그 문명의 악폐에 눌려 어느 덧 내면의 본질적인 모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그래서 무언가의 포로가 되지 않고서는 한시도 편안하게 삶을 즐길 수 없는, 내면으로 파고드는 기회란 의미의 권태가 아닌 공허로움과 따분한 느낌을 달고 사는 우리들의 씁쓸한 모습을 재치 있게 담아냈다. <수술실에서>는 가장 엄숙하고 신성해야할 수술실의 광경을 그로테스크하고 맹목적이며 블랙코미디적인 동작으로 담아냄으로써 생명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3장의 멜로드라마 <사랑을 남기고 간 소녀>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먼저, 미국으로 입양되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12살 소녀의 슬픈 실화를 통해 입양아의 문제와 참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 의도는 아주 훌륭 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문제였다. 당대에 흔히 일어났을 법한 일면 뻔한 사건을 잘 짜여진 구조와 재미있는

트릭을 사용해서 드라마틱하고 재미있게 담아낸다는 기존의 멜로드라마의 형식과는 달리,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보여 주는 사람을 함께 등장시켜서 극의 표층적인 전재 이면에 담겨있는 미묘한 심리적 흐름까지 보여주려 한 것은 좋았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경우 그런 형식이 왜 굳이 필요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대사 몇 마디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야말로 너무나 뻔한 이야기 전개를 갖고 있는 작품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자와 배우들의 지나치게 많은 불필요한 대사까지 집어넣은 것은 관객에 대한 친절한 배려의 차원을 넘어서서 관객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대 한 켠에 앉아 극을 진행시키는 해설자와 배우들의 별 의미 없는 불필요한 대사가 오히려 극을 더욱더 따분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야기를 들려 주는 사람과 보여주는 사람을 따로 분리해서 등장시킨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 둘을 따로 분리시킨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 내용과 그 말을 몸짓으로 보여 주는 사람의 몸짓 내용이 서로 상반될 때 그 미묘

한 대치 속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숨겨진 갈등이나 은폐된 진실 등을 포착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꽁꽁 숨겨져 있는 그런 진실을 포착하는 재미와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스토리 자체속에 그런 재미를 유발시키기에 필요한 극적 갈등이나 반전의 요소들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가장 재미있을 수도 있는 형식인 멜로드라마가 너무도 지루하고 답답하게 표현되었다.

일상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웃지 못할 작은 사건들을 재미있게 엮어나가 고재경의 <황당>과 낚시 이야기를 통해 수질오염의 문제를 보여준 <낚시터>그리고 <개>는 이미 있었던 작품을 좀더 탄탄하게 다듬은 것으로 이전의 공연에 비해 많이 좋아졌으나, 보다 활발한 신작 발표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정균의 신작 <거미고기>는 박남주님의 시를 무용과 마임, 음악, 세심하게 선택한 듯한 무대 의상과 소품등을 통해 상징화시킨

작품이었으나, 그 상징성이 쉽고 간명하게 와 닿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느낌을 쓰기가 조심스

러우나, 무언가 공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핏, 볼거리가 많은 공연 같다는 느낌 뒤에,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회피하고 자꾸만 부차적인 장식을 이용한 포장에만 신경 쓰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좀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함께 출연한 박수진의 몸놀림이 오히려 돋보였다.

 

이원범의 <신발 하나, 둘, 셋, 넷>은 신발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옴니버스 형식을 이용, 현실과 자아, 일상으로 부터 시원스레 벗어나

고 싶지만 쉽사리 그것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소시민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다.
옴니버스 형식이라면 똑같은 문제를 두고라도 각기 다른 독자적 접근방법과 내용을 전달해 주는 것이어야 할텐데, 그런 독자적 완결성이 보이지 않았다.
' 신발 하나 부분 ' 의 내용과 형식이 ' 신발 넷 ' 부분까지 그대로 반복되고 있어 처음의 신선한 호기심과는 달리 작품이 진행될수록

지루함만 가중되었다.

 

춘천 ' 마임의 집 ' 에서의 공연 이후 이태건의 공연을 본 것은 이 번이 두 번째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시지 않는 느낌은, 그에겐 자신이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차원 그 이상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는 점이다.
썩 훌륭한 몸짓과 잘 짜여진 구성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의 무대에서는 배우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관객들에게로 전달되는 그

무엇의 기운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좋은 공연을 보면서도 어딘지 답답한 체증 같은 것이 느껴진다. 물론 <외모>처

럼 지금의 그가 표현해낼 수 있는 아주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성실한 학생이 열심히 만들어 제출한 A학점 수준의 과제물 같은 것이 아니라, 비록 서툴고 거칠더라도 진짜 자신의 작품을 표현해 내려면 그에겐 아프더라도 더 많이 느끼고 담아둘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 때쯤 되면 그의 경직된 듯 고정되어 있는 얼굴 표정도 작품에 따라 좀 더 자연스럽고 다채로워지리라 생각한다.
많은 기대감을 갖게 하는 공연이었다.

불안하지만 가슴 한 구석 변함없이 오기 창창한 자신감을 갖고 맞이하는 서른의 나이에 접어든 한국마임의 이런 저런 모습들을 얼추 일별해 보았다.
앞서도 얘기했듯, 배우들이 추구하고 있는 마임세계의 다양성과 그들이 보여준 공연이 비록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만큼 많은 기대감

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다음 해의 공연에 다시금 기대를 걸어본다.


누구는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고 얘기했지만, 진정한 잔치는 이제부터라고 본다.


서른, 이제 진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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