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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한국마임 공연평 1 - 김봉석(늦은 후기평)

거리공연 2003. 10/19,25, 11/1

극장공연 2003. 12/6 ~ 10일, 14~17일

 

2003 한국마임을 보고 1 김봉석

 

 

* 들어가며 세상이 온통 디지털의 범람 속에 있다.

가속화와 확장성을 앞세운 디지털 문명 앞에 인간은 점점 왜소하고, 초라해져만 가고 있는 것 같다. 디지털이 가져다 주는 삶의 편리

성의 이면에는 오히려 인간존재의 의미를 더 숙고하게 만드는게 있는 것 같다.

2003년 12월 어쩌면 너무나 아날로그적인 몸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 공연을 통해 "우리는 공연을 왜 하는가?" "우리는 몸으로 무엇을말하려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딜 향하는가?" 라는 원초적 사색과 그 의미, 당위성을 되짚어 본다. 분명 마임의 영역은 날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보다 자리를 꽉 메운 관객에게서,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임의 수요와 공급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문구처럼 디지털 세상에서도 여전히 마임은 시공을 넘어 가장 표현의 중심에 있는 공연장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그 미세한 영혼의 떨림으로부터 빅뱅처럼 강렬하게 다가 드는 전율까지 인간의 진실성과 무한한 변화를 느낄 수 있기에 관객은 마임을 기억하는 것 같다.

 

우선 칭찬을 많이, 격려도 많이 주고 싶지만, 부족한 소견에 글재주도 없고 하니 기대에 못미치고 험담만 늘어 놓을지도 모르지만

본 마음을 헤아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제 극장안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고 작가들이 펼치는 자유로움과 그 깊이의 세계로 가 솔직하고 아름다운 몸의 소리와 영혼을

소통해보자.

 

[빈손]

- 유진규네 몸짓 여러해 동안 빈손을 보아왔다. 그동안 빈손도 무수한 탈피에 탈피를 거듭해왔다. 때때로 강요하다시피

짓누르는 느낌으로, 때로는 무당의 굿거리처럼..... 때론 자신의 삶의 무게를 그대로 내던지는 느낌으로..... 그리고 오늘은 설명으론

풀 수 없는 온화함을 드리우며 다가온다. 빈손 속에는 작가 개인뿐만 아니라 무수한 타인들의 상처와 고통, 욕심, 그리고 상념의 기억들이 삶의 편린처럼 묻어 있는 듯 하다.

언제쯤 빈손은 그저 빈손으로 다가올까?

탁! 털어 버린 빈손. 이런 빈손을 기대해보면 약간의 온화한 느낌(관조적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이번 빈손도 아쉬움을 남긴다.

 

유진규님의 공연은 좋은 굿형식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자신만의 언어로, 한국인의 정서가 깃든 형식으로써 ...

이는 아직 마임의 형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있는 다른 마임연기자들에겐 좋은 귀감이 된다고 본다.

다시 공연으로. 칼춤에서의 굶고 강한 진동이 그려내는 선은 연신 부드러운 느낌으로 흐르고 있다. 욕심을 가누지 못한 치달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유진규님은 체구도 그리 크지 않고 또, 움직임도 공간을 크게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공간을 넉넉히 채우고있다는 느낌이다. 한지에서는 빛과 그림자에 의한 강렬한 이미지가 존재의 무상함을 단순명료하게 대비시켜 보여 주고 있다.

향과 상여소리에선 어둠속의 또 다른 움직임들이 주는 여백과 상상, 그리고 영혼들의 긴 여운을 드리우고 있으며 마지막 움켜 쥔 빈손은 무상함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투박한 몸짓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반복성이 두드러지는 움직임, 사족으로 느껴지는 부연의 몸짓들, 그리고 중복되는 메타포들 등. 여기에 소재의 강도와 느낌에 따른 시간의 배치, 구성상의 논리적 전개의 모호성이라는 연출상의 이유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런 요인들이 빈손이 아직 허심탄회한 빈손이 아님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 정서에 비운다는 표현이 있다. 진지하게 때론 무심하게 쓰는 말이지만 그 경지는 매우 깊은 것이다. 비움은 채워서 보여 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비움으로서 채움을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마임이기에 더더욱 그러한다고 본다. 그가 본질적이고 솔직한 몸의

가는 선율로부터 온 몸으로 진동하는 폭발력까지도 비움으로써 온유하게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찌꺼기를 걷어 내고

정재된 술을 담듯이 삶의 관조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물을 움켜 쥔 그의 손에서(표현을 빌어) "초월과 온유의 흐름"이 더 깊어질 때소통의 꽃은 눈시울 뜨거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 관객에게 바라는 것은 기다림의 미학을 갖는 것이리라.

 

[오늘을 여는 나]

- 이경열 장난기 어리고 귀여운 느낌을 갖고 있는 배우가 이경열인 듯 하다. 그가 드러내는 몸에선 고통의 끝단에서 조차 밝고 희망

차게 전이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낙천적인 성격탓인가?????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이 잘 드러나 귀여운 악동의 그것처럼

전혀 아프지 않게 다가왔다. 이땅의 남자들.... 참 무겁고 어둠침침할 화두가 발칙한 유쾌함으로 다가와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게 한다. 그러나 공간 구성요소로서의 의미가 약했던 무대막, 종이소품들, 그리고 객석에서 등장해 연기한 배우들의 어수선함은 무대에 불필요한 혼란을 주었다. 마지막 장면의 오프닝이벤트는 그 비약적 전환이 밀도있게 다가오지 못한 것은 클라이막스를 향한 압축된 에너지와 리듬을 충분히 쌓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경열님의 <오늘을 여는 나>는 아직 습작에 머무르는 인상을 주었다.

이경열님의 소재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다른 작가들도 치열하게 시도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적 삶의 느낌을 작가들이 외면해서는 안된다. 때때로 작가들의 작품속엔, 의도는 아니지만 너무 낭만적 사고의 오류를 범해

그 리얼 (real)이 옅어지는 걸 경험한다. 당당하게 자신의 통찰력으로 그것을 객관화시켜, 그것을 즐겁게 보여주던, 아프게 보여주던

상관없이 세상을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곧 작가의 세계관이자 우주관이다. 이경열님이 그만의 좋은 코드를 찾아 더

발전된 모습으로 자꾸 다가오길 바란다.

 

[축구]

- 사다리움직임연구소 보는 그대로 스포츠의 박동감과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보는 그대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첫 공연때보다 그 만족감이 떨어지는 것은 보는 재미만 있는 작품이 갖는 한계성 때문이리라. 식어 가는 월드컵 열기처럼.... 또 하나, 불필요한 포즈들이 극 중간중간에 많이 배치되어 극의 속도와 재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오히려 잦은 포즈를 줄이고 스피드와 아이디어의 전환을 꽤해야 할 것 같다.

 

[기다리는 마음]

- 고재경 먼저 이날 관객이 어떻게 작품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피고 가야할 것 같다. 초연때 <기다리는 마음>은 그 안에, 고재경님

이 인내하며 보낸 사유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하나의 포근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대학로 바닥을 배회하며 고민하던 때, 극진행과 몸사용에 있어서 점차로 자기 연출력을 찾아가던 때 등등등. 작가의 몸에 기록된 성실한 사유의 시간들은 이렇게 고즈넉한 여유와 온화함으로 다가든다. 냉소적인 시선과 황당함으로 웃음을 던져 주던 그 광대가 아니었다. 발그레한 빰에 고무줄 질근 맨 그 광대도 아니었다. 그 속엔 치열한 외로움 끝에 비로소 느낀 그리움이 아름답게 담겨 있었다. 화냄이 아닌, 아이 같은, 연인을 기다리는 사내같은, 충직한 개와 같은, 그리고 마치 옛 우리 어머니의 고운마음처럼... 고운 기다림으로 넘어서고 있다.

생의 아름다운 변화는 삶의 탄력을 준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불쾌감과 감상분위기를 방해할 정도의 특정인들의 커다란 웃음소리,

시도때도 없이 쳐대는 박수소리등, 자꾸 뭔가를 유도해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연은 대부분 작가의 작업안에서 완성을 본다.

그러나 그 최종완성은 극장에서 관객과의 교감속에 이루어진다. 극장에서 비로소 준비한 모든 것들에 생동감이 불어 넣어 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만큼 극장안에선 작가의 책임, 관객의 책임이 공존해야 한다. 그날 관객의 이같은 반응(피드백)은 고재경님의 몸짓을 그저 슬픈 광대가 보여주는 에피소드정도로 흘러 가게 했다. 점차 진지함과 당당함을 상실해가는 몸짓은 냉소적인 미소로 관객을 웃겼던 " 황당 " 의 지류상에 머물고 말았다. 연민이 갑자기 밀려온 것은 이때문이었다. 요즘 극장안에서 이루어지는 슬픈단편이다.

심지어는 지인의 공연이 끝났다고 중간에 우루루 몰려나가 텅빈 객석을 남겨놓거나 막장사이에 혼자서 열심히 박수를 쳐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등....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단아한 음악에 맞춰 보여준 고재경님의 아름다운 변화는 계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다음에 보면 묵언으로 그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고 싶다.

 

[신문 - 추락하는 삶들 ]

- 프로젝트 판 양복을 뒤집어 입은 유쾌한 설정, 마치 고착화된 우리의 의식에 딴지를 거는 듯하다. 정치, 섹스, 그리고 신문지상에

있을 법한 모든 화제들이 까발려지고, 비틀어지고, 생기 어린 웃음으로 바뀐다. 시종 경쾌한 리듬에 유쾌한 이야기 전개는 엔돌핀을

급상승 시킨다. 이런 생산적인 에너지를 느낄 때 삶은 비로소 탄력이 생긴다. 이 또한 예술작업이 근본적으로 지향해 나가야하는 것이다. 신문에는 연출가 유홍영의 오랜동안 숙성끝에 나온 색깔이 베어 있다. 일상의 오브제를 통한 동심같은 세계를, 혹은 풍자 가득한해학적인 세계까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신문 - 추락하는 삶들>은 아주 중요한 뭔가가 빠진 상태에서 실이 잘못 꿰진 느낌이다.

현실의 무게감 때문일까? 아님 신문이라는 오브제의 중압감 때문일까? <신문>은 명쾌함 뒤의 허전감이 더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우선은 희극적이기만 한 극의 템포와 표현의 사실성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템포는 흥을 돋구는 역할도 하지만 자칫 가벼워지고 진지성을 잃을 수 있다.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한 표현은 그 사실성이 강도가 커서 관객에게 사고의 여백보다는 감각적 반응을 강하게 불러 올 수밖에 없다. 더우기 그 소재들이 성이나, 기타 사회적 금기, 그리고 가장 현실적 반응일때 그 강도는 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극장에 잠시 앉아 있어도 현실을 잊을 수는 없다. 현실을 잊게 하고 순응하게 한 취루적인 공연은 구시대에 수없이

많이 이루어졌고(특히 냉전시대)지금의 자본제일주의 시대에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라. 하루종일 TV는 무수한 감각적 수단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지 않은가?

연극은, 마임은 달라야 한다. 사람을 즐겁게 하면서도 취루가 아닌 보다 깊이 있는 어떤 것을 주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오브제의 자유와 한계성의 문제다.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미디어 중의 하나인 신문은 그것이 온전한 진실을 담든, 아니든사실을 세상사를 기록하고 전파하는 역할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활자화된 지면은 바쁜 현대사회의 소통의 매개체로서 기능이 크며 때때로 그러한 소통은 인간을 예속시키기도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브제를 쓸 때는 그 자유와 한계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된다고 본다.

놀이 이상의 직접적인 삶의 이슈에 요구되는 것은 작가나 연출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다. 이 통찰력으로 삶의 빛과 그림자 양면을모두 보여 주므로써 관객 스스로 현실감을 찾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은 진정한 소통의 리얼을 담을 수 있다.

건강하고 생산적인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프로젝트 판의 작업은 휼륭하다. 더 기대를 해보자면 더 긴 호흡과 진중한 느낌으로 긍정성을 넘는 깊이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부연으로 덧부치자면, 모든 극은 속도와 리듬의 영향을 받는다. 속도와 리듬의 운용을 동,서양으로 구분해 보자면 서양은 7음계 중심의 리듬에 움직임이 논리적이고 절대적인 특성을 지니며, 동양은 5음계 중심으로 비논리적이며 상대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 (다른 문화권의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고 일반적인 기준에 의한 분류임) 이러한 근본적 차이에 의해 베인 정서적 리듬은 몸에 온전하게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간혹 서양의 것을 아무리 똑같이 따라한들 그 느낌들이 다르고 몸과 맞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문>의 극전체를 지배하는 희극적 리듬은 서양7음계 구조가 지배적이다. 그것이 즐거움을 자아내고, 생동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과 무게감에 따라 리듬은 다르게 사용돼야 한다. 빠르고 경쾌한 희극적 리듬은 가벼워지기 쉽고 그 진지함을 잃기 쉽다. 반면 느리고 무거운 비극적 리듬은 지루해지기 쉽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또한, 동양의 비논리적이고 상대성이 강한 음계의 성질에는 7음계가 담지 못하고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어렵다는 얘기는 그만큼 자유로운 부분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리듬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연구가 덧붙여지면 좋겠다.

 

[덫], [이불의 꿈]

- 노영아 덫에 걸리니 많은 생각이 난다. 덫에 걸리지 않았으면 하지도 않았을 많은 것들을....

인간이 사고하기 시작한 이 후 크고 작은 덫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존재해왔다. 실제로 나와 인연을 맺고 흩어지는 사람중에도 덫과 관련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매한가지고. 나 또한 덫과 관련한 작품을(나빌레라) 낸 적이 있다. 물론 난 덫이라 생각하기보다

는 그저 인간이 원초적으로 갖을 수 밖에 없는 번뇌라고 생각했고 외부와 내면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미미하지만 그 답에 대한 생각을 풀어 보았던 것이다.

 

누군들 이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공포와 시간을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느 순간 덫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싶으면, 또 다른 덫에쌓여 있고, 넘었는가 싶으면 또 덫에 빠져 있는 순간들을.... 덫에 걸리면 참 아픔니다. 자신안으로의부터의 덫, 타인으로부터의 덫,

거스를 수 없는 질서로부터의 덫 등등 작가 노영아는 이런 인간내면의 덫(번뇌와 굴레)를 말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빛을 향하고

그 빛 속에 살포시 들어가 평안을 느껴 보기도 하고, 혹은 가부좌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떨쳐낸 듯 평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덫은 아직도 모호하기만 하다. 그것이 자신안의 이미 경험되었던 덫 들인지, 아님 한번쯤 풀어볼 상념의 덫인지 아직은

불분명하다. 관객이 작가의 덫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경험속에 내재한 아주 작은 코드를 확장 시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책임은 작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빛 속에 두려움과 낯설음으로 살며시 몸을 드리밀어 봄으로써, 기도하듯 사유없는 합장으로 덫을 벗어 나지만 그안에는 마치 구도자의 그것같은 리얼이 부족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덫에 대한 상념들은 아직 관념의 틀에서 머물고 있고, 관념은 몸 구석구석에서 모호한 미로를형성하고 있다고 하겠다.

어쩌면 덫의 대부분은 자신 안에 있는지 모른다.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수용과 포용, 그리하여 초월적 입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에야 비로소 노영아님의 덫은

발목을 아프게, 우리의 목을 아프게 죄지 않으며 한층 평화로운 빛으로 다가올 것 같다.

 

두 번째로 보여준 <이불의 꿈>은 마임가의 한계라는 덫에 걸린 작품같다. 소통의 단절을 강요하는 듯한 빛과 무대사용은 큰 불편을

주고 있었다. 표현에 있어서 시각화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관객은 보이지 않거나 모호한 무대에 집중하다 제풀에 지쳐 버릴 것

같다. 보조적인 청각적 요소도 없다. 마치 부조리극에서 보여주는 단절의 한면을 보고 있는 듯 싶다.

2인의 마임가가 있었더라면 관객이 짐을 덜었을텐데.....

작가는 이불속에서 애증섞인 관념에 스스로를 묶고 있었다. 무겁고 힘든 단절이 관객과 무대사이에 놓였다.

이것이 1인 연기의 한계와 몸이 갖는 한계의 모호성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다른 마임가가 접근하지 않는 얘기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고 본다.

그것이 진정한 작가의 출발점이 아닐까 한다. 자신도 모르게, 삶을 다루는, 인간과 우주를 다루는 작가들이, 쉽고 피상적인 작업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보일 때 작가 노영아님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들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

- 최경식님은 1인극의 자유로움에, 그리고 연극이나, 무용에 비한 판토마임의 매력에 매료되서는 안된다. 왜냐면 몸이 일정한 틀에

갇히며, 또한 문화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의 가속성과 확장성이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아직 판토마임 테크닉을 받아들인 한국마임초기 답습의 경계에 있는 것 같은 최경식님은 보다 확장되고 창조적인 작업을 위한 과감한도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운수 좋은 날]

- 김현철,손삼명 열심히 변화와 실험을 거듭하는 이 부부를 보고 있으면 진정으로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과 포근함을 느끼게

된다.

현진건의 " 운수 좋은 날 " 을 모태로 한 이 작품은 탈을 의인화, 인형화한 시도, 특별히 제작한 의상, 단촐하지만 분명한 색감으로

놓여진 소품,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솔직함을 담고 있는 노력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그 노력이 답보상태에 있는 지금은 왠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아직 그 구성이나 연출에 있어서 미완의 노력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대본 구성에 있어서 연출의 안목을 넓혀야겠다. 주제와 연출의 방향성에 기초한 소재의 선택, 결정이 있어야겠다.

다음으로 소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겠다.

무대위의 소품은 한마디로 살아 있어야 한다. 몸이 갖지 않은 확장성을 찾아내 무대위에 살아 있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위

의 소품이나 오브제는 그 용도에, 고정된 물체성에 머물고 만다.

다음으로 기능적 행위와 극의 템포와 리듬에 관한 고찰이다. 저글링에는 타이밍과 관련된 물리적 속도가 우선시 된다. 이를 무시하면실수로 곧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동적 움직임에는 물리적, 심리적 속도가 조화를 꽤하고 있다. 이는 고도의 의식적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이해로부터 조화와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하여 극 전체의 리듬을 잘 다듬어 내야 한다.

격려보다는 아픈 소리를 더 주는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이 부부가 진정으로 변화발전을 꽤하기 위해서는 와신상담의 마음으로이해해 주길 바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인고 뒤엔 좋은 결실이 있으리라 본다. 먼길(경주)에도 마다하지 않고 와서 공연을 한

김현철, 손삼명 부부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발전을 기대한다.

 

[길]

- 이두성 다양화된 작품유형과 많아진 참가자에 비해 작품의 깊이와 치열함이 부족한 2003년 한국마임인 것 같다.

작가들 스스로 타성에 깃들어 안주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님 삶의 무게가 너무 짐스러워서일까? 단순한 게으름 탓일까?

여러 생각을 해본다. 여전히 소박한 이두성님의 몸에선 더 이상의 확장된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길>이란 제목에서 연상되고 확장될 수 있는 느낌과는 다르게 자기연민과 상념의 그림자가 짙다. 작가가 자신의 삶의 그림자를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낼 때 관객은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몸짓 또한 순화된 느낌보다는 고통스런 한풀이처럼 비춰질 수 있다.

이두성님은 잠깐의 뒤돌아 봄이 필요한 것 같다. 스스로를 경계하여 자신의 애증과 연민을 닦아 내고 한층 순화한 몸짓으로 다가와

주었으면 한다.

 

[상념 1. 2 ]- 김원범, [The War]- 예술무대산, [가시나무새]-김원범,이윤재,김희연

-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 것처럼 열심히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김원범의 몸짓은 예전에 비해 달라진 몸짓이었다.

예전 수수하기만 하던 그의 몸짓엔 굵은 선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양하게 변화되는 근육의 선들에서 고무줄 같은 탄력과 그리고 충분히 절제된 선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으며 <상념>이란 자칫 지루하기 쉬운 주제를 지루함 없이 잘 이끌고 있었다. 또한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미지들은 시종일관 강한 집중력을 유발시켰다.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김원범의 사유의 시간들이 발아를 한 걸까?

 

그러나, 무형의 구체화란 쉽지 않은 작업은 몸의 한계성을 드러나게 만든다. 반복돠는 듯한 움직임, 진솔하게 내비쳐진 육체의 속성등은 드크루스타일의 다른 연기자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실적인 느낌이 강한 팔과 손의 많은 움직임, 표현보다는 기능적 작용을 더 수용하는 하체의 움직임은 내면의 진동을 약화시키고 동작을 리드미컬하게 만들어갔다. 극의 리듬과는 상관없는(혹 상관이 깊더라도) 이 같은 육체의 속성은 뒤에 이어진 ,와 <가시나 무새>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창작은 스타일에 제약받지 않는다. 이제 숙제가 있다면 드크루의 잘 소화된 방법에 자신만의 표현법을 담아내는 것이다.

공간에 비해 스케일이 컸었던 극장공간을 다양하게 사용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러나 구상과 실황은 차이가 있는 법. 떨어지는 낙하산, 날으는 비행기, OHP(overhead projector)를 이용한 영상등은 그 효과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공중에서 투하된 낙하산은 채공시간이 맞지 않아 느낌과 여운이 감소했다. 너무 단순화된 구성, 인형과 배우를압도해 버린 영상, 그리고 김원범의 리드미컬한 움직임(그 씬이 비록 회상을 전제로 할지라도)은 오히려 사족처럼 남겨 졌다. 아이의 눈과 회상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그려내려한 의도는 좋았으나 극의 어디에도 초점이 맞춰진 느낌없이 김원범의 집약된 메타포는 없었다. 전쟁이 어떻다는 건 피상적일지라도 누구나 잘 안다. 고형화된 인형의 얼굴뒤에 내포된 수많은 느낌이 오히려 섬뜩하게 다가오는 느낌과 세세하게 잘 다룬 인형의 조정등에서 김원범이나 예술무대산의 보다 적극적인 주장과 메타포를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너무 쉽게 다큐영상에 모든 느낌을 내준 느낌이다. 성급한 미완으로 다가온 그 주제의 무게감 만큼이나 다듬고 채워야 할 것이 많은 듯하다.

 

지금 이 작품의 공연 의미가 뭘까?

현실과 별개의 느낌 사이에서 어리둥절함도 있었지만 순수한 창작에 그 초점을 맞춰 본다.

인간과 신의 딸과의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가 완성도 있게 잘 표현된 작품이었다. 가면과 천, 그리고 바디페인팅은 그 신화적 분위기를잘 느끼게 해주었고 스토리 또한 간결하게 시작과 끝을 잘 구성하고 있다. 극의 템포와 리듬 또한 몽환과도 같은 서정적인 느낌으로 잘 전달되었다. 신과 인간의 권능의 대비를 보여준 적절한 공간 활용은 오히려 공간을 더 활용해도 괜찮았을 것 같다. 다만 신의 딸(천)을 다룰 때 천의 재질감을 고려해서 보다 신중하게 다루어 그 내면의 비극적 깊이를 끌어 올려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앞에서 열거했듯이 김원범의 변화는 몸짓 뿐만 아니라 전체적 안목으로 확장되고 있는 듯 하다. 김원범님의 변화에 박수를 보내고,

세작품에서 리드미컬하게 드러나는 움직임, 보다 자유로운 호흡과 움직임, 드크루를 공부하고 온 다른 작가들과의 유사성의 문제,

그리고 아직 착하게만 보이게 하는 분출되지 못하는 내면의 압력에 대한 고민이 있기를 바랜다. 짝! 짝! 짝!

 

[오르페우스]

- 윤종연 신화를 소재로 한 두 번째 작품이면서 작가 윤종연님의 연출력과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또한 김원범님의 <가시나무새

>가 신화를 온전하게 다룬 작품이었다면, <오르페우스>는 현대적의미에서의 드라마터지(dramaturgy)에 대한 노력을 보인 작품이었다. 무게감처럼 명확한 무대장치, 색조명의 적극적 이용, 공간 극대화를 위한 잘짜여진 움직임등, 밀도 있는 연출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아직 다듬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아직은 집중되지 못한 에너지의 일관으로 무대를 부유하게 하는 연기자들, 명확하지만 오브제로서의 확장을 위한 코드가 부족했던 장치, 낯익은 표현법들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극은 그 최종 완성을 다루는 연기자에게 항상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극 중심에 있던 박종태님의 독특한 느낌의 연기는 그로테스크함마저 자아내게 하지만 아직은 내적 긴장이 높고, 내면의 리듬을 담지 못한 느림과 줄임(절제)의 연기에서 불필요한 압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연기는 극전체를 통한 비극성보다는 감정적 비극성을 앞에 세우게 된다. 쉽게 말해 이미 이 인물이 혹은 이 극이 비극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쉽게 드러내게 한다고 하겠다.

연기의 절제와 자유로움은 공간과 함께 이루어진다. 공간을 비워 여백을 줌과 동시에 절제 속에 자유로움이 생기고, 내면의 진동으로 다시 그 공간을 채울 때 살아있는 아름다운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배우들의 축적된 경험과 느낌이 온전하게 드러나 녹아 나올 것이다. 이야말로 가장 리얼한 순간이다.

한창 젊은 윤종연님에겐 더 많은 시간이 있어 그 기대감과 희망을 크게 한다. 짝! 짝! 짝!

 

[남과 여 그리고 풍경]

- 박미선, 오꾸다 마사시(일) 박미선과 오꾸다마사시님의 호흡이 잘 맞았던 작품으로 마치 한편의 실화를 옮겨 놓은 듯한 강렬한

인상을남겼다. 작품자체는 아주 단순한 느낌으로 한 풍경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재경님의 등장과 장난기 어린 비누방울 놀이는 사족인 듯 하면서도 관객을 객관적 관찰자로서 시점에 머물게 하고 있다.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 속에 오래도록 가슴에 타고 내렸을 사랑의 고통과 그리움이 미세한 떨림으로 관객을 강하게 끌어 당긴다.

어찌보면 그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부토를 연상시키기도 할듯하다. 그러나 부토의 느낌들이 시간성에 의해 용서와 포용을 요구받게

되고 그 변화를 모색받게 된 시점에서 볼 때 분명히 부토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하겠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두 배우들의 몸이다.

극도록 절제된 움직임 속에 끊어질 듯 절절히 다가오는 내면의 흐름은 40중반을 다가서는 두 배우들의 몸의 기록 같았다.

몸은 시간을, 삶을 기록한다. 살아가면서 축적된 기록들은 배우에게 이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담게 한다. 여자의 고통도 죽어 가는

남자의 고통과 같다. 오꾸다마사시님의 아직 훈련이 필요한 듯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불안한 떨림도, 봇물 넘치듯 넘쳐 나던 박미선님의 내면의 에너지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서로의 현재를 공유하며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조명과 색상으로 작품전체의 느낌을 맑고 청량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랜만에 본 박미선님의 호흡이 잘 맞는 작품이었

다.

 

[개미]

- 조성진 몸짓패 빈탕놀이 극에 있어서 음악은 보조적 수단으로 극을 강화시켜 준다. 그러나 노래는 노랫말에 실린 의미와 감정으로

보다 감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노래가 극의 어느 부분에 배치되는가에 따라 극전체의 리듬과 분위기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개미에서의 기타반주에 맞춘 노래, 보이스 아트처럼 잔잔하게 흐르던 재즈풍의 노래는 삭막한 세상을 음유하듯 혹은 단절되어 공허한듯 분위기를 이끌어 간다. 볼거리가 많았던 개미, 베짱이, 그리고 여왕벌레, 조명, 장치, 의상, 분장들...... 작품은 베짱이가 바라본

개미들의 일상을 통해 현대인들의 우울한 삶의 한 단면을 꼬집고 있으며, 인생을 먼지에 비유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무대위에서 상연되는 극으로서 그 극적구성이 다른 극과는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거리에서 오고 가며 자연스럽게 혹은 부담없이 볼 수 있는 구성을 띄고 있었다. 삶에 치열한 무게감보다는 음유하는 듯한 노래, 시적인 듯한 대사가 극적 분위기나 함축된 느낌을 배제하고 있었다.

공간에 대해서 잠시 혼돈이 생긴다. 생의 현장인 거리는 삶의 리얼을 담은 그 자체로 역동성이 있다. 그러나 극장이란 공간은 별개의 인위적 공간이다. 이 공간은 작가와 관객과의 철저한 약속에 의해 유지된다. 그래서 극장을 거리와 같은 느낌의 현장으로 이끌어 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우선은, 관객의 혼란이다. 관객은 극장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 자신의 일상밖의 인간과 우주에 대해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무형적 참여를 통해 극의 최종적 완성에 관여하며(이 부분은 앞에서 한번 다뤘다)시대를 공유 하는 것이다.

 

다음은 공연장르가 갖고 있는 특색의 퇴색이다. 마임은 마임대로의 상상력을 공유하여 깊고 폭넓은 느낌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점,

시와 비견되는 함축된 전달력, 그리고 본질에서 나오는 진실성과 순수성을 통한 느낌의 다양한 폭을 ..... 최종적인 것은 작가의 선택

에 달려 있다. 그러나 결정시에는 이러한 견해들이 우선 고려되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개미>에서는 그 느낌이 아주 재미있고

특별하게 다가왔으나, 여왕벌의 알낳기의 움직임과 시간의 배치에서 오는 무게감의 모호성, 현대풍의 인도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개미들의 부조화성(배우들의 몸이 음악과 배치되고 있음), 아직 움직임의 동기와 여건을 충분히 갖추진 못한 배우들의 동선등이 정리안된 혼선으로 있으며, 생체적 에너지의 리듬으로 채워져야할 무대가 이성으로 지어진 무대로만 남아 있는 인상이었다.

아울러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세계관은 동화책을 읽어 준 느낌으로 다가왔다. 숙제가 여러 고민으로 남는다.

 

[마임!일상]

- 강정균, 현대철 코믹이라는 부자연스런 단어가 배우들을 가두고 있는 무대였다. 이미 계산된 웃음에 기대고 움직여지는 동작들.

새로운 느낌이 적었던 소재들, 소품들(가방속 소품들도 계산된 도구이상의 기능은 없음)그리고 조금은 다시 생각해봐야할 포맷. 자연스럽지 못했던 연기. 웃음은 누구나 좋아 한다. 그러나 기왕이면 시원한 웃음, 삶의 탄력을 가져오는 웃음을 위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도둑이야기]

- 이경식 이제 막 마임에 들어선 이경식님도 도둑이야기로 또 하나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작이 늦은 만큼 그의 갈길은 멀다.

아직은 마임테크닉에 의한 묘사와 설명이 많은 무대. 표현과 설명은 분명히 다르다. 부지런한 행보를 해서 보다 성숙하고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조금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으로 몇자 적다보니, 너무 감상적이거나 야속한 얘기를 많이 썼네요. 죄송한 마음으로 포용해주

시기를 바라며 끝얘기로 2003 한국마임을 정리합니다.

 

** 나가며 전체적으로 2003 한국마임은 작품, 작가의 양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서 다가오는 깊이와 감동은 적은 무대였다.

그리하여 각각의 작품들에서 작가들의 확고한 세계관이나 우주관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 같다. 마임을 한다는 자체에 안주하려는

타성도 함께 비치며 아직은 마임이라는 형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을 발전과 진보와 확장을 위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공연예술계 상황을 살펴 보자. 디지털의

영향력은 공연계에도 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디지털은 이미지, 사운드, 데이터나 텍스트들을 혼합해 자유로운 이동, 편집, 압축,

저장, 확장, 전달, 재생을 가능케 했으며, 가상세계의 구축과 강력한 양방향성의 소통을 만들어 시공간의 제약을 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 공연도 스스로의 장르를 허물고 보다 창조성과 소통성에 중심을 실어가고 있다. 장르의 경계가 사라지면 표현의 세계에는 빛과 소리와 역동적인 움직임만 남는다. 빛과 소리는 자연과 우주를 이루는 근본요소이며, 역동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고유영역이자 가장 폭넓은 영역인 것이다.

마임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우주적 소통의 언어를 담고 있는 분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디지털의 속성을 이미 몸안에 담고 있다. 표현의 근간확장을 위한 치열한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것이다.

 

* 극단사다리와 크레이지버드 씨어터 이정훈님의 공연은 한 날 같이 공연한 관계로 공연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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